시마즈 나리아키라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사쓰마의 11대 번주. 막말 4현후로 꼽히는 명군 중 하나이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을 등용하고 서양 문물을 잘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2. 생애[편집]
분카 6년(1809) 3월 14일, 사츠마번 10대 번주 나리오키(島津斉興)의 장남으로 에도성 사츠마번 저택에서 태어났다. 난벽[1] 성향으로 번의 재정을 말아먹은 증조할아버지 시게히데(島津重豪)의 난벽을 물려 받은건지, 어릴적부터 서양 문물에 심취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마침 2년 후 태어난 작은 할아버지 쿠로다 나가히로[2] 와 함께 서양의 문물을 즐기며 에도성에서 성장했다.
나리아키라의 아버지 나리오키는 핵심 가로 즈쇼 히로사토(調所広郷)와 함께 할아버지가 말아먹은 번의 재정을 복구시키느라 평생을 고생했는데, 장남인 나리아키라가 할아버지처럼 서양 문물에 눈을 번뜩이자 질색팔색을 했다고 한다. 본디 적통 후계자가 성인식을 치르면 선임 번주는 가로직을 물려주고 상왕정치를 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10대 번주 나리오키는 나리아키라가 장성한 뒤에도 당주 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시간을 끌었고, 카에이 원년(1848) 경에 와서는 가로 즈쇼와 함께 5남 히사미츠(島津久光)[3] 를 후계자로 밀었다. 하지만 나리아키라도 막부 중앙정부의 로쥬(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를 비롯해 친(親)나리아키라 성향의 다이묘 군단[4] , 그리고 사츠마번의 소장파(혹은 친나리아키라파) 무사들을 동원하는 등 외교전에 들어갔고, 카에이 4년(1851) 3월 4일 쇼군의 명령을 통해 아버지를 은퇴시키고 11대 사츠마 번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오유라 소동)
번주로 즉위한 직후 카에이 4년 7월, 토사번 출신의 표류민 존 만지로가 미국에서 사츠마로 흘러들어오자 사츠마 번사들을 동원해 미국식 (선진) 조선법을 캐내기도 하고, 사츠마번에 용광로, 조선소, 공업단지 등을 건설하고 면포 방직 사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더 나아가 서양식 군함(昇平丸)을 건조해 에도 막부에 헌상하며 일장기를 걸 것을 제안하기도 했고, 쿠로후네가 일본으로 건너오기 이전부터 일본 최초의 자국산 증기선(雲行丸) 생산에 착수하는 등 서구문물의 수입과 자국[5] 공업화, 그리고 해군양성에 집중된 번정을 펼친다.
국내 정치에 대해서도, 나리아키라는 토자마 다이묘로서 소외된 시마즈 가문이 에도 막부 중앙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오유라 소동 당시 동맹으로 나서준 친나리아키라 파벌의 다이묘 모임과 어울리며 공무합체(公武合体)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다녔는데, 이 모임의 또다른 대표 슬로건이 존황양이(尊皇攘夷)였기 때문에, 난벽 다이묘로 명성이 자자한 나리아키라답지 않게 양이론의 기치 아래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시마즈 분가에서 텐쇼인을 양녀로 받아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 부인으로 보내기도 하고, 이에사다의 후계자를 정할 때도 한마디 얹는 등 토자마 다이묘답지 않은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세이 5년(1858) 7월 5일, 히토츠바시파는 결국 반대파[6] 의 당수 이이 나오스케에게 패배해 난키파(南紀派)가 밀던 고산케 키슈번주 이에모치가 차기 쇼군에 올랐고, 히토츠바시파는 정란을 맞아 대숙청을 당하게 된다. (안세이 대옥)[7]
한편, 이 시기 나리아키라는 에도성을 나와 영지인 사츠마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지난 5일, 다이로 나오스케가 지멋대로 후계자를 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무력으로 항의하기 위해 카고시마에서 군을 일으켜 교토로 출진할 준비에 들어간다. 그러나 거병을 준비하던 7월 8일 갑자기 쓰러지고 7월 16일 그대로 급사한다. 나리아키라는 이복동생 히사미츠의 아들 타다요시(島津忠義)에게 12대 사츠마 번주의 가독을 물려주고, 선대 가주이자 친아버지였던 나리오키에게 후견인 역할을 맡긴 뒤 세상을 떠났다.
3. 여담[편집]
안세이 4년(1857) 9월 17일, 가신이었던 이치키 시로(市来四郎)를 시켜, 일본 최초의 사진을 찍은 것[8] 으로 알려져있다. 사진의 피사체는 나리아키라 본인의 초상.
정치적 동지였던 마츠다이라 슌가쿠로부터는 슌가쿠 자신은 물론 야마우치 요도나 나베시마 나오마사를 능가하는 당대 제일의 다이묘라는 극찬을 받았다. 나리아키라로부터 발탁되어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사이고 다카모리나 오쿠보 도시미치로부터도 존경받았으며, 나리아키라와는 다른 세력에 속했던 가쓰 가이슈나 이토 히로부미 또한 나리아키라를 비범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5 10:36:03에 나무위키 시마즈 나리아키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오란다(네덜란드=서양) 문물 덕후 기질[2] 증조할아버지 시게히데의 13남. 훗날 쿠로다 가문으로 입양을 들어가 성씨를 바꾸게 된다. 마찬가지로 난벽 다이묘로 유명세를 떨쳤다.[3] 나리오키의 첩실이였던 오유라(お由羅)가 낳은 아들. 성인식 때 받은 이름은 타다유키(島津忠教)지만 본 문서에서는 역사상의 이름으로 남게 된 히사미츠로 통일해 서술.[4] 훗날 이이 나오스케와 충돌하며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차기 쇼군으로 밀었던 히토츠바시 파벌의 원년 멤버들이다. 우와지마(宇和島) 번주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후쿠이(福井) 번주 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 등이 목록에 들어간다.[5] 사츠마번을 의미[6] 공무합체에 반대해 막부 중앙권력의 강화를 주장하고, 존황양이에 반대해 개국론을 주장했다. 차기 쇼군으로 밀던 이에모치가 고산케 키슈번주였기 때문에 키슈번의 별명에서 따와 난키파(南紀派)라고도 불렀다.[7] 안세이 5년, 에도 막부의 정국은 1) 차기 쇼군을 둘러싼 당파싸움, 2) 공무합체 문제, 3) 존황양이론 및 개국론 문제, (존황양이와 연결되어) 4) 계속 압박을 가해오는 미국과의 조약비준 문제 등이 한꺼번에 얽혀있는 시기였다. 자세한 사항은 안세이 대옥 문서를 참조할 것.[8] 다게레오타이프(Daguerréotype): 은판사진법